달과 나

 수필가  김영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달과 별로 하여금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 이후로 해와 달은 변함없이 하늘에서 뜨고 지고 영겁의 세월을 되풀이한 채, 이제 나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려 한다. 선친께서 어쩌면 기막히게 나의 이름을 강원도 영월(寧越)이 아닌 영월(永月)로 지어 주셨는지 모른다. 아무튼 달 과 인연이 있는 이름때문인지 평생 달의 이미지를 못 벗어나고 해보다도 달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특이한 이름 덕분에 지나온 세월 동안 무수한 놀림감 이 되어

"왜 내게 이런 이름을 지어 주셨나" 하고 부모님을 원망할 때도 많았지만 끝까지 개명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버텨 온걸 되레 감사히 여긴다. 은행에서 지점장이라는 나의 명함을 고객에게 건네면 대부분 첫 인사말이 "아이구, 이름이 참 좋으십니다. 혹시 본명이 아니고 예명이신가요?" 하는 질문을 받곤한다. 한편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회식 자리에서 가끔 짓궂은 동료 녀석이 내 이름이 기생이름과 비슷하다 하여 이런 노래를 불러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 적도 더러 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띵- 호아 띵- 호아.

사춘기 시절에 해와 달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의 대명사처럼 느껴졌다. 해가 동녘 하늘에 떠오르면 수줍은 듯 서녘 하늘로 숨는 달인가 하면, 반대로 달이 동녘 하늘에 미소를 지으면 해는 또 서산에 기울어 버리고..... 이런 숨바꼭질 놀음이 계속되는 걸 보면 그들의 기구한 운명이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다. 시집을 읽으며 잠 못 이루던 문학 소년으로서 나는 시골마당에 나와 밤하늘의 달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걸 좋아했다. 중천에 높이 솟은 보름달은 다정하게 나를 반겨주고 교교한 달빛아래 한없이 순결한 세계를 맛보았다. 달빛을 받아 노오란 웃음을 가만히 터트리던 뒤란의 달맞이 꽃은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가. 이렇게 달과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춘궁기의 쪼그륵거리는 고픈 배도 잊을 수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세례를 받으며 밤이 이슥하도록 나는 영랑과 소월 시인의 싯귀를 읊조렷다. 부모님보다도 그 어떤 친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벗, 밤하늘의 달은 감수성이 강한 나의 소년 시절을 사로잡았다.

외로운 병영 생활에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지금도 밤하늘의 달을 바라볼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한 여인이 있다. 매월 빠짐없이 "샘터"라는 잡지와 고운 글을 함께 보내주던 그녀는 나를 "달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그믐과 보름사이를 오가는 달의 이미지와 나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이 비슷했는지 몰라도 나는 그녀의 달님인체 많은 사연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칠 무렵에 그녀와 연락을 끊고 지낸 지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파도치듯 흘러 가 버렸다. 어느 하늘 밑에 그녀는 중년의 아낙네로 참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느 가을 날, 책갈피에 끼워 내게 보낸 고운 단풍잎에 만년필 글씨로 그녀가 적어 놓은 글귀는 아직도 내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따라 추억은 물들지라도 그대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옛 것일러라"

요즘도 나는 늦은 퇴근길에 중천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달님으로 사랑해 주었던 한 여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과연 내 이름에 걸맞게 달님의 고운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 걸까. 언제 바라봐도 변함없는 하늘의 밝은 달을 마음속에 지니며 고이고이 살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다. 세상의 명예와 욕심, 그리고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마음에 때가 묻고 딱딱하게 굳어 가는 걸 느낀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월 시인의 싯귀를 읊조리며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 김소월과 박목월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내 이름처럼 "달 월" 자가 들어 가 있는 게 무슨 우연의 일치일까. 어째든 나도 어린 시절의 꿈이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전혀 엉뚱한 은행원으로 살아가게 될 줄이야.

아내와 자정이 넘은 시각에 팔월 한가위 달을 보기 위해 아파트 주변을 거닐어본다. 비록 시골의 뒷동산은 아니지만 북한산 자락밑 수유리 쪽이라 그런지 휘영청 밝은 달이 여왕처럼 떠올라 반겨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에서 달빛이 말갛게 쏟아져 내려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건 안보간 보름달은 그 환한 빛을 쏟으며 이 밤을 지켜 주리라. 달과 운명지어진 듯한 내 이름 석자를 사랑하며 이제 나는 습관처럼 밤하늘의 달을 눈길로 더듬는다. 그래서 눈썹 같은 초생달이거나 송편 같은 반달이거나 쟁반 같은 둥근달 이거나 달과 더불어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에 만족한다. 잠깐 발길을 멈추고 달을 바라보는 것으로 내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비워 달빛처럼 새하얘 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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